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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과 말/책 리뷰

피천득의 『엄마』를 읽고

by Stefanokim 2026. 3. 13.

세상의 모든 단어 중에서 가장 입술을 가볍게 부딪히며 소리 내지만, 그 울림은 평생을 가는 이름이 있습니다. 바로 ‘엄마’입니다. 한국 수필의 정점으로 불리는 금아 피천득은 그의 글 <엄마>를 통해 우리 마음속 가장 깊은 곳에 숨겨둔 유년의 보물상자를 열어젖힙니다. 그의 글을 읽고 있으면, 마치 뽀얀 먼지가 내려앉은 옛 사진첩을 한 장씩 넘기는 기분이 듭니다.

 

피천득의 문장은 참으로 담백합니다. 화려한 수사나 거창한 철학을 늘어놓지 않습니다. 대신 어머니의 정갈한 하얀 수건, 깨끗하게 깎아 내어주던 밤과 대추, 그리고 자식을 바라보던 그윽한 눈빛 같은 사소한 풍경들을 나열합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 소박한 묘사들이 독자의 마음을 더 세게 두드립니다. 아마도 그것은 꾸며낸 감정이 아니라, 평생을 그리움 하나로 버텨온 한 남자의 정직한 고백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수필 속의 어머니는 늘 단정하고 향기로운 존재로 그려집니다. 작가는 어린 시절 어머니가 입으셨던 옷의 촉감이나 집안을 감돌던 고요한 공기를 기억해냅니다. 이는 단순히 과거를 회상하는 것을 넘어, 어머니라는 존재가 한 인간의 영혼에 얼마나 깊은 문장을 새겨넣는지를 보여줍니다. 그에게 어머니는 단순히 나를 낳아준 분이 아니라, 세상을 아름답게 바라보는 법을 가르쳐준 첫 번째 스승이자 영원한 예술적 영감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글이 유독 아릿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그가 일찍 어머니를 여의었기 때문입니다. 피천득에게 엄마는 ‘곁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 ‘부재함으로써 영원히 함께하는 존재’였습니다. 그는 어머니를 일찍 잃었기에 그 기억이 더 아름답게 박제되었을지도 모른다고 덤덤히 말합니다. 일찍 이별했기에 작가는 노년이 되어서도 마음속 한구석에 어머니의 치맛자락을 붙잡고 있는 소년의 모습을 간직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결핍이 도리어 맑고 투명한 문학의 샘물이 되었다는 사실이 슬프면서도 경이롭습니다.

 

우리는 흔히 어머니를 생각할 때 고생과 희생, 헌신 같은 무거운 단어들을 먼저 떠올리곤 합니다. 하지만 피천득의 <엄마>는 우리에게 조금 다른 시선을 제안합니다. 어머니 또한 한 명의 고결한 인격체였으며, 자식의 삶에 은은한 달빛처럼 스며들어 영혼의 결을 다듬어주던 다정한 동반자였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작가가 회상하는 어머니의 모습은 오늘날 바쁘게 살아가는 우리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당신의 소중한 이들에게 어떤 기억으로 남고 있느냐고, 그리고 당신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쉴 수 있는 방 한 칸이 남아 있느냐고 말입니다.

 

피천득의 글은 읽는 이로 하여금 각자의 ‘엄마’를 불러오게 만듭니다. 누군가는 이미 닿을 수 없는 먼 하늘을 바라볼 것이고, 누군가는 지금 당장 수화기 너머 들려올 목소리를 떠올릴 것입니다. 형태는 제각각일지라도 그 본질은 같습니다. 바로 조건 없는 사랑과 영원한 편이 되어주던 그 온기입니다.

 

삶이 유독 춥고 외롭게 느껴지는 날, 피천득의 문장을 따라 걷다 보면 어느새 마음이 평온해짐을 느낍니다. "괜찮다, 다 괜찮다"라고 말해주던 어머니의 따스한 손길이 문장 사이사이에 배어 있기 때문입니다. 작가는 그리움을 슬픔에 가두지 않고 아름다운 수필로 승화시켰습니다. 우리 역시 그의 글을 통해 잠시나마 세상의 소란을 잊고, 가장 순수했던 소년과 소녀의 마음으로 돌아가 봅니다.

 

결국 이 에세이는 한 개인의 추억담을 넘어,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가장 숭고한 감정에 대한 찬가입니다. 하얀 수건처럼 깨끗하고, 밤알처럼 달콤했던 그 시절의 기억들. 피천득이 남긴 문장들은 여전히 우리 곁에서 은은한 향기를 풍기며 말해줍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힘은 거창한 성공이 아니라, 아주 오래전 누군가에게 받았던 그 지극한 사랑의 기억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