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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과 말/책 리뷰

요시모토 바나나 『키친』를 읽고

by Stefanokim 2025. 8. 8.

 
세상에는 사람마다 저마다의 ‘안전지대’가 있다. 어떤 이는 오래된 서점의 먼지 냄새를, 또 어떤 이는 카페 창가에 앉아 내리는 비를 보며 마음을 달랜다. 요시모토 바나나의 『키친』에서 미카게에게 그 안전지대는 부엌이었다. “나는 부엌을 세상에서 가장 좋아한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이 소설은, 한 사람의 잃어버린 가족과 그 빈자리를 채우는 온도의 이야기이자, 부엌이라는 공간이 품은 삶의 질감에 관한 고백이다.
 
미카게는 부모도, 조부모도 없이 외할머니와 살았다. 하지만 외할머니마저 세상을 떠나고, 그녀는 완전히 혼자가 된다. 그 시절의 고독은, 문득 모든 불이 꺼진 집에 들어섰을 때의 차가운 공기와 닮아 있다. 하지만 유우이치와 그의 어머니 에리코가 미카게를 집으로 맞이하면서, 부엌은 다시 온기를 띠기 시작한다. 부엌에서 함께 밥을 지어 먹고, 식탁에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누는 일이, 사라진 세계를 조금씩 복원하는 일이 된다.
 
이 작품에서 ‘부엌’은 단순한 요리의 장소가 아니다. 부엌은 냄비에서 김이 오르고, 칼이 도마 위에서 리듬을 만드는 곳이며, 삶이 매일 새로 끓어오르는 자리다. 요시모토 바나나는 이 평범한 공간을 상실과 치유의 상징으로 그려낸다. 누군가와 함께 부엌을 공유한다는건, 삶의 리듬을 함께 맞추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루의 시작과 끝, 배고픔과 포만, 심지어 침묵마저 공유되는 곳. 미카게는 그 부엌 속에서 비로소 누군가와 ‘살아간다’는 감각을 회복한다.
 
그러나 『키친』이 아름다운 이유는, 그것이 결코 완전한 치유의 이야기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은 여전히 떠나고, 상실은 삶의 한 축으로 남는다. 에리코가 갑작스레 세상을 떠난 뒤, 미카게와 유우이치는 다시 깊은 상실의 물결 속에 놓인다. 하지만 이번엔 부엌이 있다. 그들은 부엌의 불빛 아래에서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며, 고독과 고독이 맞닿는 순간에도 삶은 여전히 따뜻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배운다.
 
『키친』을 읽다 보면, 우리가 사랑하는 공간과 사람이 서로 닮아간다는 생각이 든다. 어떤 사람은 집 안 가득 햇빛이 들어오는 창처럼 느껴지고, 또 어떤 사람은 조용히 끓고 있는 스프 냄새처럼 마음을 편안하게 만든다. 미카게에게 유우이치와 에리코는 바로 그런 존재였다. 그래서 부엌은 단순한 공간이 아니라, 그들을 품은 하나의 추억이자 풍경이 된다.
 
요시모토 바나나의 문장은 담백하지만 결코 얕지 않다. 감정을 과장하지 않으면서도, 독자가 그 감정을 깊이 느끼게 한다. ‘사람은 떠나도 그 사람이 남겨놓은 온도는 사라지지 않는다’는 메시지가, 부엌의 따뜻한 전등 아래에서 은근히 전해진다.
 
『키친』을 덮고 나면, 나 역시 내 삶의 부엌을 떠올리게 된다. 어린 시절 엄마가 끓여주던 미역국 냄새, 겨울밤 난로 옆에서 까먹던 귤의 달콤함, 혼자 살기 시작했을 때 전자레인지에 돌린 인스턴트 수프마저도 그 시절 나를 버티게 한 작은 부엌의 기억이었다.
결국 부엌은 우리 안의 ‘살아갈 이유’가 모여드는 자리다. 슬픔이 아무리 깊어도, 부엌의 불을 켜고 물을 끓이는 순간, 삶은 다시 움직인다. 요시모토 바나나의 『키친』은 우리에게 이렇게 속삭인다.
 
“당신이 지쳐 돌아올 곳은, 누군가 기다리는 부엌이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