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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과 말/책 리뷰

파트리크 쥐스킨트 『깊이에의 강요』를 읽고

by Stefanokim 2025. 7. 30.

 

우리는 ‘깊이 있는 사람’, ‘깊이 있는 작품’, ‘깊이 있는 삶’이라는 말을 너무나도 쉽게 쓴다. ‘

깊다’는 형용사는 무겁고 존엄한 느낌을 준다. 반대로, ‘얕다’는 형용사는 가볍고 경박하며 속이 빈 무언가를 연상시킨다.

그래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아니 강요당하듯이 더 깊어지려 한다.

그러나 파트리크 쥐스킨트는 『깊이에의 강요』에서 이런 질문을 던진다.

“과연 깊다는 것은 무조건 좋은 것인가? 우리는 정말 ‘깊어져야’ 하는가?”

이 짧고도 강력한 에세이는 이 질문에 대한 뼈아픈 성찰을 담고 있다.

 

쥐스킨트는 글의 첫머리에서 “나는 깊이를 두려워한다”고 말한다.

이 고백은 놀랍고도 아이러니하다.

『향수』라는 걸작을 쓴 작가, 삶과 인간의 본질을 집요하게 파고드는 작가가 ‘깊이’를 두려워한다고 말하다니.

하지만 이 문장은 일종의 전복이다.

그가 두려워하는 것은 진짜 ‘깊이’가 아니라, 깊어 보여야 한다는 강박, 그리고 그 강박이 가져오는 일종의 문학적 허영이다.

그는 현대 예술계와 문학계, 나아가 현대 사회 전체가 ‘깊이’라는 단어를 맹목적으로 숭배하고 있다고 말한다.

어떤 문장, 어떤 음악, 어떤 인생도 단순하거나 명랑하거나 가볍기만 하면 평가절하된다.

우리는 그것이 “얕다”고 말하며 무시한다.

그러나 쥐스킨트는 말한다.

그 '깊이'라는 것, 정말 존재하는가?

혹은 우리가 ‘깊이’라고 믿는 것들은 실은 그저 복잡하거나 난해하거나 비논리적인 것들에 대한 착시 아닐까?

그는 이 딜레마를 “어떤 사람이 연못에서 나오지 않고 몇 시간이나 물속에 있었다고 치자.

그는 분명 깊은 곳에 다녀왔지만, 정작 아무 의미도 없는 곳에서 헤엄쳤을 가능성이 크다”고 풍자한다.

이 장면은 『깊이에의 강요』의 핵심 은유이자 비유다.

'깊어 보이는 것'이 실은 아무 의미 없는 것일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진지하고 어두우며 난해한 것을 보면 “깊다”고 착각하지만, 사실 그 안엔 아무런 내용도 없을 수 있다.

 

쥐스킨트는 또 다른 예로, 자신의 책장에 꽂힌 수많은 철학서들을 언급한다.

쇼펜하우어, 칸트, 헤겔, 하이데거.

그는 이들을 열심히 읽으려 했지만, 대부분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다고 고백한다.

그런데도 그는 책을 읽으며 무언가 “깊은”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깊이는 ‘무엇을 말했는지’가 아니라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 것’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 고백은 독자로 하여금 뜨끔하게 만든다.

우리 역시 어떤 책을 읽을 때, 그 책이 무엇을 말하는지를 따지기보단, 그 분위기나 난해함에서 ‘깊음’을 감지할 때가 많다.

그 순간 우리는, 이해하지 못한 자신을 탓하며 책이 ‘너무 깊어서’ 어렵다고 느낀다.

하지만 쥐스킨트는 이런 자기기만을 날카롭게 해부한다.

“그저 난해한 것을 보고 깊다고 여기는 것, 그것이야말로 가장 얄팍한 깊이 아닌가?” 그는 묻는다.

이 대목에서, 쥐스킨트는 인간이 ‘깊이’를 통해 자기를 정당화하고 싶어하는 심리를 파헤친다.

우리는 스스로를 ‘깊이 있는 사람’으로 보이길 원한다.

그래서 어렵고 어두운 책을 선호하고, 무겁고 진지한 주제를 말하며, 감정을 절제하고, 웃음 대신 침묵을 선택한다.

그것이 마치 지혜롭고 성숙한 태도인 것처럼.

그러나 쥐스킨트는 이것이 본질적 깊음이 아니라, ‘깊이 있음처럼 보이기 위한 장치’일 수 있다고 경고한다.

 

『깊이에의 강요』는 단지 ‘깊이’를 풍자하고 비판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쥐스킨트는 독자에게 다른 길을 제시한다.

“얕은 것을 얕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 “가볍고 명랑한 것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자세” 말이다.

그는 우리가 굳이 철학적인 고뇌나 존재의 본질 같은 무거운 질문을 매일 끌어안고 살아야 하느냐고 되묻는다.

가벼운 농담, 명랑한 대화, 단순한 즐거움 속에도 삶의 진실은 충분히 존재한다고 말이다.

쥐스킨트의 이 메시지는 프랑스 철학자 질 들뢰즈나, 바흐친의 ‘카니발적 웃음’과도 일맥상통한다.

진정한 지혜란 반드시 어두운 얼굴을 하고 있을 필요가 없다.

오히려 얕은 것을 얕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스스로의 깊이에 대한 맹목에서 벗어난 진짜 자유인일 수 있다.

쥐스킨트는 문학도 마찬가지라고 말한다.

좋은 문학은 반드시 난해하고 고통스럽고 철학적일 필요가 없다.

오히려 명확하고 경쾌하며, 단순하고 직설적인 문장이 더 깊은 울림을 줄 수 있다.

그가 자신의 대표작 『향수』를 통해 보여준 것도 바로 이런 ‘단순함 속의 진실’이었다.

인간의 본능, 냄새에 대한 집착, 존재의 욕망을 그는 어렵지 않은 문장으로, 오히려 직설적으로 표현했다.

그 결과, 수많은 독자들이 그의 문장 안에서 ‘깊이’를 느낀 것이다.

 

우리는 종종 ‘깊은 삶’이란 고통과 고뇌로 가득한 삶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쥐스킨트는 말한다. “고통이 곧 깊이는 아니다.” 물론 인간의 고통은 철학과 예술의 출발점일 수 있다.

하지만 모든 고통이 자동으로 깊이가 되지는 않는다.

고통 속에서, 혹은 단순한 삶 속에서 무엇을 발견하고 어떻게 사유하느냐가 진짜 ‘깊이’를 만든다.

그는 삶과 문학에서의 ‘깊이’ 개념을 다시 생각하자고 제안한다.

겉으로 보기엔 얕고 가벼워 보일지라도,

진심이 담겨 있고 스스로에 대해 솔직한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짜 깊은 것이다.

반대로, 아무리 어두운 주제와 고상한 언어로 치장했더라도,

그 안에 자의식만 넘치고 진실이 없다면 그것은 가장 얄팍한 것이다.

쥐스킨트의 주장은 문학을 하는 사람들, 예술을 하는 사람들,

그리고 무엇보다 ‘깊은 사람’이 되기를 강박적으로 욕망하는 모든 현대인에게 하나의 경종을 울린다.

그는 말한다.

“깊이는 강요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부드럽게, 때로는 무심코, 그러나 반드시 솔직하게 다가와야 한다.”

 

『깊이에의 강요』는 한 편의 수필이지만, 그 안에는 소설보다 더 강렬한 서사와 철학이 담겨 있다.

그는 독자에게 ‘깊어 보이는 사람’이 되지 말고, ‘진심으로 느끼고 말하는 사람’이 되라고 한다.

얕음이 두려워 깊은 척하지 말고, 무지함이 두려워 아는 척하지 말라고.

우리가 추구해야 할 진정한 깊이는 단지 철학적 단어 몇 개를 암기해서,

혹은 고통의 언어를 빌려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진짜 깊이는 스스로를 향한 정직한 질문과, 그것에 대한 유연하고도 용기 있는 태도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때로 그 깊이는, 조용히 웃고 있는 얼굴이나, 아이처럼 단순한 문장에서 훨씬 더 선명하게 빛날 수 있다.

파트리크 쥐스킨트는 우리에게 말한다.

 

“깊이를 강요하지 말라. 깊이란, 스스로를 잊을 때 비로소 드러나는 어떤 것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