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말이 칼이 되는 순간
가르친다는 것은 무엇일까.
말을 전하고, 지식을 공유하고, 한 사람의 생각이 다른 사람의 삶에 작은 불빛이 되는 일.
우리는 그것을 교육이라 부른다.
하지만, 과연 그것은 그렇게 순결하기만 한가.
외젠 이오네스코의 『수업』을 읽는 동안, 나는 몇 번이나 불편한 심리적 고비를 넘겼다.
이 희곡은 단순한 설정 위에 지독한 아이러니를 쌓아올린다.
교사는 말한다. 학생은 대답한다.
그러나 이 수업은 점점 이상한 방향으로 기울고, 결국엔 비극적인 결말로 치닫는다.
이오네스코는 단지 말을 주고받는 방식만으로, 무섭도록 선명하게 인간의 권력,
언어의 폭력, 지식의 교만을 무대 위에 펼쳐놓는다.
말을 배우는 일이 이렇게 위험할 수 있다는 사실, 그것이 나를 멈칫하게 만들었다.
1. 말의 무게, 혹은 무게 없는 말
처음엔 모든 것이 평온해 보인다.
학생은 수업을 받으러 오고, 교사는 친절하게 맞이한다.
이름도 없는 등장인물들, 그저 ‘학생’, ‘교수’, ‘하녀’라는 명칭으로만 존재하는 이들은,
누구나 될 수 있고 누구도 아닌 얼굴들이다.
익명성이 주는 보편성은, 곧 이 이야기가 특정한 인물이 아닌 우리 모두의 이야기임을 암시한다.
수업은 덧셈에서 시작된다.
말하자면, 세상에서 가장 기본적인 언어와 논리의 훈련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교수의 말은 기묘하게 길어지고, 난해해지고, 공격적으로 바뀐다.
그는 질문을 던지지만, 대답을 원하는 게 아니다.
그는 말한다.
계속 말한다.
그리고 학생의 말은 점점 줄어들고, 고개는 아래로 꺾인다.
언어는 점점 무기가 된다.
단어는 창처럼 날카로워지고, 문장은 벽처럼 밀려든다.
한때는 진리를 담는 그릇이었던 말이, 이젠 누군가를 옭아매는 족쇄로 변하는 것이다.
이오네스코는 우리에게 묻는다.
“너는 너의 언어로 누군가를 찌른 적이 없느냐”고.
2. 지식은 권력일까, 권력은 폭력일까
교수는 학생에게 지식을 가르친다.
적어도 그렇게 보인다.
그러나 그가 추구하는 것은 지식의 전수가 아니라, 지식을 가장한 지배다.
그는 모른다는 사실을 용납하지 않는다.
틀린 대답은 질책의 근거가 되고, 논리의 모순은 오히려 교수의 말에 권위를 더해준다.
점점 더 고통스러워지는 학생의 모습 앞에서도, 교수는 멈추지 않는다.
“네가 이해하지 못하는 건 네가 무지해서가 아니라, 내가 강요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희곡을 따라가다 보면, 교사의 말이 어느 순간부터 전혀 가르침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것은 자신을 드러내기 위한 독백이며, 타인을 지배하기 위한 도구다.
그는 말로 학생을 조종하고, 말로 그의 존재를 부정하고, 말로 결국 그를 파괴한다.
이오네스코는 이 과정을 통해 우리가 평소 아무렇지 않게 쓰는 ‘지식’이라는 말의 두 얼굴을 보여준다.
지식은 누군가의 성장에 쓰일 수도 있지만, 누군가의 침묵을 강요하는 무기로도 쓰인다.
그것은 타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증명하기 위한 수단이 될 때, 비로소 권력으로 변한다.
그리고 권력은, 언제나 폭력과 손을 잡는다.
3. 희극처럼 웃다가, 비극으로 숨이 막히는 순간
『수업』은 기본적으로 부조리극이다.
이오네스코의 전작들처럼, 언어의 불일치와 의미의 무의미 속에서 웃음을 유도한다.
그러나 그 웃음은 서늘하고 불편하다.
우리는 교수의 말장난과 학생의 어처구니없는 반응에 웃다가도,
어느 순간 숨이 턱 막히는 장면과 마주하게 된다.
학생이 점점 고통을 호소하고, 교수는 그를 향해 ‘해부’하듯 언어를 휘두를 때,
이 수업은 더 이상 웃음의 대상이 아니다.
그것은 잔인한 의식이며, 권력의 추악한 축제이며, 말이 말의 기능을 잃고 칼로 변하는 장면이다.
그리고 마침내, 학생은 죽는다.
놀랍게도 이 장면은 아무런 특별한 연출 없이 그저 덤덤하게 지나간다.
죽음조차 이 세계에선 일상적이고 반복적인 사건처럼 보인다.
마지막 장면, 또 다른 학생이 들어오는 순간, 이 끔찍한 수업은 되풀이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깨닫게 된다.
그리고 다시, 이오네스코는 묻는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이 끔찍한 수업의 한 장면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4. 내가 받은 수업, 내가 건넨 수업
희곡을 덮고 나서, 나는 내 삶의 수업들을 떠올렸다.
내가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가르치려 했던 순간들.
그 가르침 속에는 진심과 애정이 있었지만,
어느 날은 피로와 짜증이,
또 어느 날은 나도 모르게 우월감이 스며 있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말을 건넨다는 것은 언제나 권력의 위에 선다는 것.
그것은 생각보다 더 민감하고 더 조심스러운 일이다.
말을 전하는 자로서, 나는 얼마나 많은 책임을 외면했던가.
그리고 누군가의 말을 들으며, 나는 얼마나 자주 고개를 숙이고 침묵했던가.
『수업』은 단순한 희곡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익숙한 삶의 은유다.
부모와 자녀 사이, 선생과 제자 사이, 상사와 부하 사이,
혹은 연인 사이에도 존재하는 말의 균형과 불균형.
우리는 그 언어의 무게를 얼마나 자주 무시하고, 혹은 남용하고 있는가.
5. 다시, 조심스럽게 말을 꺼낸다
이오네스코는 『수업』을 통해 언어의 본질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언어는 소통의 수단인가, 지배의 도구인가, 혹은 고독의 산물인가.
그 질문은 우리 모두의 말하기와 듣기의 자세를 다시 돌아보게 만든다.
그래서 나는 다시 조심스럽게 말을 꺼낸다.
누군가와 이야기할 때, 그가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그 사람의 무지 때문이 아니라,
내가 그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말이 칼이 되지 않도록, 말이 말 그대로 남아있도록,
나는 오늘도 천천히, 아주 천천히 말을 건넨다.
그리고 가만히 귀 기울인다.
그의 말은 어디를 향해 가는지, 그의 눈빛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이제는 말보다 더 큰, 침묵의 언어를 배워야 할 시간인지도 모른다.
이오네스코의 『수업』은 끝났지만, 삶의 수업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수업은, 말이 아니라 마음으로 배워야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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