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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과 말/책 리뷰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말테의 수기』

by Stefanokim 2025. 7. 16.

어둠 속에서 내면을 쓰다 — 릴케의 『말테의 수기』를 읽고

 

한 도시의 어두운 뒷골목, 가느다란 가스등 밑을 지나가는 사람들, 

병든 거지, 구부러진 창틀, 죽음을 앞둔 노인들, 그리고 한 청년.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말테의 수기』는 이런 이미지들로 시작된다. 

겉으로 보면 단순한 파리의 풍경일 뿐이지만, 

그 속에는 인간 존재의 근원적 불안과 고독, 죽음에 대한 직면, 

그리고 예술이 향해야 할 내면의 진실이 격렬히 뒤섞여 있다.

 

 

『말테의 수기』는 이야기라고 부르기 어려울 만큼 단편적이고 파편적이다. 

그러나 그 조각들은 하나의 공통된 방향을 향한다. 

나는 살아야 한다. 하지만 나는 쓰고 있다.” 

말테의 이 진술은, 결국 인간 존재는 살아가는 동시에 끊임없이 ‘쓴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 ‘쓰기’란 기록이 아니라 내면의 진실을 붙잡으려는 행위, 

말하자면 고통 속에서 삶의 의미를 찾아나가는 몸부림이다.

릴케는 말테를 통해 우리에게 묻는다. 

우리는 ‘’이라는 표면에 현혹되지 않고 그 안의 진실에 다다를 수 있는가? 

우리는 죽음을 마주할 수 있는가? 

우리는 고독 속에서 자라날 수 있는가? 

말테는 사랑도, 가난도, 병도, 죽음도 피하지 않는다. 

그는 모든 감각을 열어 세상의 고통과 자기 안의 어둠을 흡수하고, 

그것을 언어로, 침묵으로, 떨리는 손으로 기록해 나간다.

 

나는 『말테의 수기』를 읽을 때마다 릴케가 쓴 다른 시구가 떠오른다.

 

삶이란 모든 것을 사랑하는 것이다. 심지어 고통도.

 

릴케에게 있어 진정한 예술은 아름다운 형식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두려움과 죽음, 그리고 상처를 외면하지 않는 깊은 성찰에서 피어난다. 

말테는 아마도 릴케 자신의 내면 그 자체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수기’라기보다 릴케가 자신의 영혼을 고백한 시에 가깝다.

『말테의 수기』는 문학의 경계를 흐린다. 

소설이면서 시이고, 일기이면서 철학이며, 고백이면서 예언이다. 

한 문장 한 문장이 깊은 심연처럼 펼쳐지고, 

독자는 그 속에 빠져들어 고요한 격랑을 만난다. 

이 책은 묻는다. “당신은 스스로를 살아내고 있는가?

나는 그 질문 앞에서 쉽게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그리고 그 부끄러움이, 곧 나를 다시 살아가게 했다.

 

 

릴케의 영향을 받은 예술가들

릴케는 단지 시인이 아니었다. 그는 문학, 음악, 미술,

심지어 철학에 이르기까지 깊은 영향을 미친 내면의 예언자였다.

그의 영향은 광범위하며, 깊이 있고 은밀하다.

그를 직접 인용하지 않아도, 그 정신을 계승한 예술가들은 많다.

 

 1. 벤자민 브리튼 (Benjamin Britten)

영국의 현대 음악 작곡가.

릴케의 시를 가사로 한 『The Holy Sonnets of John Donne』 나 『Les Illuminations』 같은

성악곡에서 릴케적인 죽음과 영혼의 고독, 초월에 대한 묘사가 뚜렷함.

 

2. 알베르토 자코메티 (Alberto Giacometti)

스위스 출신의 조각가.

인간 형상을 파괴하면서도 존재의 본질을 찾아가는 자코메티의 인물상들은 릴케가 말했던

존재의 불확실성과 고독침묵의 아름다움을 닮아 있음.

 

 3. 첼란 (Paul Celan)

독일어권 시인.

언어의 파편성과 고통의 기억 속에서 새로운 시적 언어를 창조한 첼란은 릴케를 통해

시가 고통과 죽음을 정면으로 바라볼 있음을 배움.

 

 4. 무라카미 하루키 (村上春樹)

일본 현대소설가.

하루키는 직접 릴케를 언급하기도 했으며, 작품 전반에 흐르는 고독, 죽음, 내면 여행,

음악적 언어감각은 『말테의 수기』의 영향과 연결됨.

특히 『노르웨이의 숲』이나 『1Q84』에서 내면 성찰의 방식은 릴케적인 면모를 보임.

 

 

5. 테오 앙겔로풀로스 (Theo Angelopoulos)

그리스의 영화감독.

그의 영화는 고요하고 침묵 속에서 인간 존재의 무게와 상처를 보여줌.

릴케의 시처럼 화면과 대사는 최소화되지만, 감정은 매우 깊음.

 

6. 사진작가 프란체스카 우드먼 (Francesca Woodman)

그녀의 사진은 자주 인물의 흐려진 형체, 비물질성, 내면의 그림자를 표현함.

릴케가 말한 “우리는 존재를 완전히 사랑해야만 그것을 초월할 수 있다”는 시적 정신과 닮아 있음.

 

 

릴케는 단지 시를 쓴 것이 아니라, 존재의 방식 자체를 새롭게 제안한 사람이었다. 

『말테의 수기』는 예술이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끊임없이 되묻는 책이며, 

지금도 수많은 예술가들이 그 질문을 물려받고 있다.

그가 말했듯, 시를 쓰려면, 먼저 살아야 한다.

릴케는 ‘사는 것’이 얼마나 두렵고, 외롭고, 

눈부신 일인지를 가장 먼저 겪은 사람 중 하나였고, 

그래서 그의 언어는 아직도 우리를 위로할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