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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과 말/책 리뷰

이탈로 칼비노의 『존재하지 않은 기사』

by Stefanokim 2025. 7. 15.

 

갑옷 속의 공허, 혹은 인간됨의 조건 ― 이탈로 칼비노의 『존재하지 않은 기사』에 대하여

 

사람이란 무엇으로 존재하는가? 

육체인가, 의지인가, 혹은 사회가 부여한 역할인가? 

이탈로 칼비노는 『존재하지 않은 기사』에서 

이러한 본질적인 질문을 놀라운 상상력과 아이러니로 풀어낸다. 

작품의 주인공은 아질루울포. 그는 몸이 없이, 의지와 규율만으로 존재하는 기사다. 

완전무결한 기사로서 모든 군사 규율을 따르고, 매너와 윤리를 어김없이 지키며 전쟁터를 누빈다. 

그러나 그는 실재하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자면, 실체 없이 존재하는 갑옷이다.

 

칼비노는 이 기묘한 존재를 통해 인간의 정체성과 실존에 대해 통렬하게 질문한다. 

몸이 없으면서도 이상적인 기사로 기능하는 아질루울포는 ‘너무 완벽해서 인간이 될 수 없는’ 존재다. 

그는 욕망도, 의심도, 실수도 없다. 

그의 삶에는 틀림이 없지만, 따뜻한 흔들림도 없다. 

그는 존재하지만, 살아 있지 않다. 그렇다면 살아 있는 인간이란 과연 무엇인가?

이와 대비되는 인물이 있다. 

 

같은 군대의 병사인 가르두르는 너무 인간적이다. 

실수하고, 허세를 부리고, 거짓말도 한다. 

그는 전형적인 ‘부족한 인간’이지만, 그 안에는 생동감이 있다. 

반면, 아질루울포는 전쟁터에서 누구보다 이상적으로 기능하지만, 

그 내부에는 텅 빈 공허만이 가득하다. 

이 아이러니가 칼비노의 핵심 메시지다. 

인간은 완전해서 인간이 아니라, 불완전하기에 인간이다.

 

 

 

 

칼비노는 이 작품에서 중세 기사도 문학의 형식을 빌리되, 철저하게 전복시킨다. 

중세의 이상적 기사는 의지와 명예, 절제를 갖춘 존재로 찬양되었다. 

그러나 칼비노는 그 이상이 인간성을 오히려 지우는 것일 수 있음을 드러낸다. 

완벽함은 차갑고 메마르며, 감정과 모순을 제거한 존재는 인간이라기보다 기계에 가깝다. 

현대 사회가 기능성과 효율을 이상화하는 가운데, 

칼비노는 그런 ‘비인간적 이상’을 유쾌한 풍자로 해체한다.

 

작품 속의 수녀이자 작가인 브라다만테, 전쟁의 광기, 황제 샤를마뉴의 허약한 통치

이단자들의 삶 등은 모두 한 사회의 다양한 모습이 투영된 상징들이다. 

그 누구도 완전하지 않으며, 모두 각자의 결핍 속에서 고유한 존재로 살아간다. 

그래서 이 소설은 단순히 기사 이야기이자 풍자가 아니라, 현대인을 위한 실존의 우화다.

 

『존재하지 않은 기사』는 칼비노의 ‘우리 선조 삼부작’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작품이다. 

『반쪽자리 자작』이 인간의 분열을, 『나무 위의 남작』이 이상을 향한 고독한 실천을 이야기했다면, 

이 작품은 존재의 실체를 잃은 현대인의 초상을 그려낸다. 

규범과 제도 속에서 역할만 수행하는 현대인은 어쩌면 아질루울포와도 같다. 

‘직장인’, ‘시민’, ‘가족 구성원’ 등 사회가 부여한 이름과 규범에 철저히 순응하지만, 

정작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해선 공허하다. 

그런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칼비노는 묻는다. 

"당신은 정말 존재하고 있습니까?"

 

결국, 칼비노는 진정한 존재란 의지나 완벽함이 아니라, 

흔들리고 불완전한 인간성 자체에서 비롯된다고 말한다. 

울퉁불퉁한 삶, 불안정한 감정, 갈등과 실패가 오히려 우리를 ‘살아 있는 존재’로 만든다. 

작품의 마지막에 아질루울포가 갑옷을 벗고 허공으로 사라지는 장면은, 

인간성을 회복하지 못한 존재의 쓸쓸한 퇴장처럼 느껴진다.

 

『존재하지 않은 기사』는 재미있고 기발한 이야기처럼 읽히지만, 

읽고 나면 마음 한구석이 싸해진다. 

그것은 아마도 우리 안에도 아질루울포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완벽하려고 애쓰다가 감정과 본질을 잃어버리는 순간들. 

그리고 그럴수록 더 강하게 느껴지는 존재의 의심.

칼비노는 그렇게 소설 속 허공을 통해, 

우리 삶의 ‘실체’를 되묻는다.

우리는 살아가고 있는가, 아니면 그저 ‘존재하고 있는’ 척하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