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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과 말/책 리뷰

새무얼 존슨의 『라셀라스』를 읽고

by Stefanokim 2026. 5. 15.

새무얼 존슨의 『라셀라스』를 펼쳐 드는 행위는, 우리 삶을 지탱해 온 ‘행복’이라는 거대한 가설에 균열을 내는 일과 같습니다. 18세기 영국 지성사의 거인이었던 존슨은 어머니의 장례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단 일주일 만에 이 소설을 써 내려갔습니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시간 속에서 탄생한 이 텍스트가 인류의 영원한 숙제인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가장 처절하고도 숭고한 보고서가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입니다. 번호나 소제목으로 구획할 수 없는 우리 삶의 복잡성처럼, 이 작품 역시 인간 실존의 어둠과 빛을 하나의 긴 호흡으로 관통하고 있습니다.

 

이야기의 서막은 아비시니아의 ‘행복의 골짜기’에서 열립니다. 이름부터 역설적인 이 공간은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물리적 결핍이 제거된 유토피아입니다. 부드러운 음악이 흐르고, 산해진미가 넘쳐나며, 육체적 고통이나 사회적 갈등은 철저히 차단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곳의 왕자 라셀라스에게 이 완벽한 풍요는 오히려 질식할 것 같은 감옥으로 다가옵니다. 그는 부족함이 없다는 사실에서 오는 ‘과잉의 권태’에 시달립니다. 이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가 마주하는 실존적 공허와 정확히 맞닿아 있습니다. 모든 욕망이 즉각적으로 충족되는 곳에서 역설적으로 욕망 자체가 거세되어 버린 라셀라스의 모습은, 인간의 정신이 단순히 안락함만으로는 채워질 수 없는 심연을 지니고 있음을 암시합니다.

 

라셀라스는 결국 현자 이믈락과 누이 네카야와 함께 그 안락한 감옥을 탈출하기로 결심합니다. 그들의 목표는 단 하나, 세상 밖으로 나가 수많은 사람의 삶을 관찰하고 그중 가장 행복해 보이는 삶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이 ‘행복의 선택’이라는 테마는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동력이자, 독자인 우리를 사유의 여행으로 인도하는 이정표가 됩니다. 그들은 카이로에 도착해 인간 군상의 화려하고도 비루한 내면을 하나씩 들여다보기 시작합니다.

 

먼저 그들은 젊음의 열기에 취해 쾌락을 탐닉하는 이들을 만납니다. 술과 노래, 끊임없는 유흥 속에서 고민 없이 살아가는 듯 보이는 그들이지만, 라셀라스는 곧 그들의 웃음 뒤에 숨겨진 천박함과 허무를 발견합니다. 순간의 감각에 의존하는 삶은 감각이 무뎌지는 순간 무너져 내리는 모래성과 같았습니다. 그다음으로 만난 이들은 지혜를 숭상하며 이성의 힘으로 모든 감정을 다스릴 수 있다고 주장하는 철학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 중 가장 당당했던 철학자조차 자신의 딸이 죽자 절망에 빠져 울부짖습니다. 이성은 이론 속에서는 완벽하지만, 몰아치는 슬픔의 파도 앞에서는 한 조각 나무판자보다 무력했습니다. 존슨은 여기서 인간이 지닌 지적 오만을 날카롭게 꼬집으며, 머리로 이해하는 삶과 가슴으로 겪어내는 삶 사이의 거대한 간극을 드러냅니다.

 

여정은 계속되어 그들은 권력을 쥔 통치자와 은둔하는 수행자들을 방문합니다. 하지만 권력의 정점에는 언제나 암살의 공포와 배신의 불안이 도사리고 있었고, 세상을 등진 은둔자의 가슴 속에는 버리고 온 세상에 대한 미련과 고독의 독이 퍼져 있었습니다. 심지어 가정의 평화조차 완전하지 않았습니다. 부모와 자식 사이의 갈등, 부부간의 사소한 원망은 가장 작은 사회적 단위인 가정마저 행복의 절대적 안식처가 될 수 없음을 보여줍니다. 라셀라스와 네카야는 깨닫게 됩니다. 어느 누구도 타인의 삶을 부러워하지만, 정작 그 삶의 내부로 들어가면 저마다의 무게로 신음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작품 중반부에 등장하는 천문학자의 에피소드는 인간 상상력이 지닌 비극적 광기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평생 별을 관측하며 우주의 법칙을 탐구해 온 이 노학자는, 자신이 기후를 조절하고 태양의 궤도를 다스리고 있다는 거대한 착각에 빠져 있습니다. 그는 세상을 구원해야 한다는 숭고한 사명감에 짓눌려 스스로를 고립시킵니다. 이는 단순히 정신질환에 대한 묘사가 아닙니다. 존슨은 이를 통해 우리가 현실의 고통이나 불만족을 잊기 위해 얼마나 쉽게 ‘상상의 도피처’를 건설하는지를 경고합니다. 상상력은 우리를 예술과 꿈으로 인도하는 축복이지만, 현실의 지표를 잃어버린 상상력은 결국 자아라는 감옥에 우리를 가두는 창살이 됩니다.

 

여정의 막바지에 이르러 라셀라스 일행이 피라미드를 방문하는 장면은 매우 상징적입니다. 거대한 돌덩이들의 집합체인 피라미드는 인간의 위대함을 증명하는 건축물이 아니라, 오히려 ‘할 일이 없는 인간의 권태’가 만들어낸 거대한 기념비로 묘사됩니다. 생존의 욕구가 해결된 인간이 자신의 존재 의미를 증명하기 위해 얼마나 헛된 일에 에너지를 쏟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이는 오늘날 우리가 끝없이 몰두하는 수많은 ‘자기계발’이나 ‘성취’의 이면에 숨겨진 공허함을 투영하는 듯합니다.

 

결국 그들은 아무런 정답도 얻지 못한 채 다시 아비시니아로 돌아갈 준비를 합니다. 존슨은 이 마지막 장에 “결론이 나지 않는 결론”이라는 제목을 붙였습니다. 무책임해 보일 수도 있는 이 마무리는 사실 삶에 대한 가장 정직한 응답입니다. 인생이라는 것은 어떤 완벽한 정답이나 행복의 지점을 찾아내어 안주하는 과정이 아니라, 끊임없이 질문하고 방황하며 그 과정 자체를 살아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행복은 도달해야 할 목적지가 아니라, 우리가 길을 걷는 동안 발바닥에 닿는 흙의 감촉과 같은 것일지도 모릅니다.

 

새무얼 존슨이 라셀라스의 입을 빌려 말하고자 했던 것은 비관론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의 한계를 명확히 인식함으로써 얻어지는 ‘숭고한 체념’과 ‘현실적인 연대’입니다. 완벽한 행복이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비로소 타인의 불행에 공감할 수 있고 사소한 일상의 기쁨에 눈을 돌릴 수 있습니다. 라셀라스와 네카야가 여행을 통해 얻은 가장 큰 소득은 행복의 비결이 아니라, 세상 모든 사람이 자신만큼이나 힘들게 삶을 견디고 있다는 깊은 동질감이었습니다.

 

긴 호흡으로 이 작품을 복기하며 우리가 마주하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행복의 골짜기’를 떠나 세상이라는 거친 파도로 나아가는 여행자들입니다. 때로는 철학자의 냉정함에 의지하고, 때로는 천문학자의 상상력에 기대며, 때로는 권력과 부의 환상을 쫓기도 합니다. 하지만 존슨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우리를 다독입니다. 그 모든 방황이 헛된 것이 아니라고, 정답을 찾지 못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 것 같아도 당신의 영혼은 이미 그 여정만큼 깊어졌다고 말입니다.

 

『라셀라스』는 우리에게 ‘행복해져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라고 권합니다. 삶의 비극성을 정면으로 응시하면서도 그 안에서 인간다운 품위를 유지하는 것, 끊임없이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으며 오늘 하루를 성실히 살아내는 것, 그것이 존슨이 고통스러운 상중(喪中)에 발견한 삶의 진실이었습니다. 문학적 감수성이란 단순히 아름다운 언어를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이처럼 서늘한 진실 앞에 겸허히 고개를 숙이고 다시 신발 끈을 묶는 태도에서 나옵니다.

 

우리의 여정도 라셀라스의 그것처럼 결론이 나지 않은 채 계속될 것입니다. 내일도 우리는 무언가를 갈망할 것이고, 모레도 어김없이 작은 실망과 마주할 것입니다. 그러나 괜찮습니다. 『라셀라스』라는 거울이 비춰주듯, 인간의 마음은 무한한 우주를 담을 수 있을 만큼 크고, 그 크기만큼의 공허를 채워가는 과정 자체가 바로 우리의 생(生)이기 때문입니다. 행복이라는 신기루를 쫓는 대신, 함께 걷는 이의 손을 잡고 이 막막한 여정 자체를 사랑하는 일. 그것이 300년 전의 현자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건네는 가장 따뜻한 위로이자 통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