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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과 말/책 리뷰

페터 한트케의 『관객모독』을 읽고

by Stefanokim 2026. 2. 9.

 

극장은 보통 안전한 장소다. 무대 위에서 누군가 울고 웃고 죽어가도, 우리는 객석에 앉아 있다는 이유만으로 면책된다. 박수칠 타이밍을 알고, 감동해야 할 장면을 미리 예감하며, 연극이라는 이름의 약속 속에서 편안하게 숨을 고른다. 그러나 페터 한트케의 『관객모독』은 이 오래된 계약을 무참히 찢어버린다. 이 작품에서 무대는 더 이상 이야기를 들려주는 곳이 아니다. 무대는 말을 던지고, 말은 칼날이 되어 관객을 향해 날아온다.

 

『관객모독』에는 줄거리가 없다. 인물도 없다. 사건도, 갈등도, 결말도 없다. 대신 배우들이 등장해 관객에게 말한다. “당신들은 아무 일도 겪지 않을 것이다.” “여기에는 드라마가 없다.” 그리고 마침내, “당신들은 위선자다.” 이 연극은 관객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관객을 상대로 실행된다. 보는 자와 보여지는 자의 경계는 무너지고, 관객은 더 이상 보호받는 위치에 머물 수 없다.

 

이 작품이 불편한 이유는 단순히 욕설 때문이 아니다. 모욕은 표면일 뿐이다. 진짜 불쾌함은, 우리가 얼마나 연극에 기대어 스스로를 속여왔는지를 들춰내는 데서 온다. 우리는 예술 앞에서 늘 ‘이해하는 사람’이고 싶어 한다. 감상하는 주체, 판단하는 주인공, 박수를 허락하는 심판자로 앉아 있다. 그러나 『관객모독』은 그 모든 권한을 박탈한다. 배우들은 말한다. “당신들은 여기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 순간, 관객은 텅 빈 자리 위에 앉아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한트케는 이 작품에서 연극을 부정함으로써 오히려 연극의 본질을 드러낸다. 연극이란 무엇인가. 이야기가 있는가, 감정이 있는가, 인물이 있는가. 한트케는 그 모든 요소를 제거한 뒤, 오직 ‘지금 여기서 말하고 듣는 행위’만을 남긴다. 무대 위의 언어는 설명하지 않고, 위로하지 않으며, 감동을 강요하지 않는다. 그 언어는 존재 자체로 관객을 압박한다. 듣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가 사건이 된다.

 

이 연극에서 가장 잔인한 질문은 이것이다. “당신은 왜 여기에 앉아 있는가?” 우리는 보통 그 질문을 묻지 않는다. 연극을 보러 왔으니까, 예술을 즐기러 왔으니까, 문화적인 사람이 되고 싶으니까. 하지만 『관객모독』은 그 모든 대답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의 관람 태도, 더 나아가 세계를 바라보는 태도까지 겨냥한다. 우리는 언제나 안전한 거리에서 타인의 고통을 소비하고, 언어를 이해했다는 착각 속에서 스스로를 안심시킨다.

 

한트케의 언어는 차갑고 건조하다. 감정을 싣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더 정확하다. 그 말들은 관객을 설득하지 않는다. 설명하지도 않는다. 단지 던져진다. 그리고 그 말이 관객의 내면에 떨어졌을 때, 우리는 비로소 깨닫는다. 이 연극은 우리를 모욕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태도를 폭로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관객이라는 이름 뒤에 숨어, 아무 책임도 지지 않으려 했다는 사실을.

 

『관객모독』이 발표되었을 당시, 이 작품은 스캔들이었다. 연극이 관객을 공격한다는 발상 자체가 금기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이 작품을 다시 읽고 떠올리면, 그것은 오히려 정직한 연극처럼 느껴진다. 한케는 관객에게 친절하지 않다. 하지만 그 불친절함 속에는 한 가지 진심이 있다. 언어를, 예술을, 그리고 인간을 더 이상 장식하지 않겠다는 결심.

 

이 작품은 묻는다. 우리는 정말 듣고 있는가. 아니면 듣는 척하고 있는가. 우리는 언어를 경험하는가, 아니면 소비하는가. 무대 위에서 던져진 말들은 연극이 끝난 뒤에도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들은 관객의 일상 속으로 따라 들어온다. 신문을 읽을 때, 뉴스를 볼 때, 타인의 고통을 마주할 때, 우리는 다시 관객의 자리에 앉아 있지 않은지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관객모독』은 불편한 작품이다. 그러나 이 불편함은 예술이 아직 살아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아무것도 주지 않으면서, 모든 것을 요구하는 연극. 감동 대신 질문을, 위로 대신 노출을 선택한 연극. 피터 한케는 이 작품을 통해 말한다. 연극은 우리를 즐겁게 하기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고. 오히려 우리를 불안하게 만들기 위해, 우리가 어디에 서 있는지를 자각하게 하기 위해 존재한다고.

 

무대 위에서 언어가 관객을 바라볼 때, 우리는 더 이상 숨을 곳이 없다. 『관객모독』은 그 순간을 끝까지 밀어붙인다. 그리고 조용히 묻는다. 지금, 이 말을 듣고 있는 당신은 정말로 아무 일도 겪지 않았는가. 아니면 이미, 어떤 균열 속에 서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