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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과 말/책 리뷰

아니 에르노의 『나는 나의 밤을 떠나지 않는다』를 읽고

by Stefanokim 2025. 9. 8.

<상실과 기억의 심연에서>

 

아니 에르노의 글을 읽을 때마다 느끼는 것은, 그녀가 언어라는 도구를 통해 삶의 가장 은밀하고 비루한 지점을 꺼내놓는 특별한 능력을 가졌다는 사실이다. 『나는 나의 밤을 떠나지 않는다』에서도 마찬가지다. 이 작품은 화려한 서사가 아니라, 오히려 침묵 속에서 조용히 무너져 내리는 기억과 육체의 기록이다. 치매에 걸린 어머니와 함께 보내는 시간, 그리고 그 시간을 지켜보는 딸의 시선. 그것은 개인적인 기록임과 동시에, 인간이 피할 수 없는 보편적인 운명에 대한 증언이기도 하다.

 

에르노는 어머니를 잃어가는 과정을 단순히 “병의 서사”로 그리지 않는다. 그녀는 어머니의 망가져가는 몸과 언어, 사라지는 기억의 잔해 속에서 여전히 남아 있는 인간적인 흔적을 붙잡는다. 한때 가족을 돌보며 강인한 삶을 살아온 어머니가 이제는 어린아이처럼 변해가고, 밤마다 방황하며, 자기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장면들 속에서 딸은 혼란과 연민, 그리고 죄책감을 동시에 느낀다. 그 복잡한 감정이 바로 이 책의 가장 큰 울림이다.

 

치매라는 병은 죽음보다 더 잔인하다. 죽음은 단번에 존재를 끊어내지만, 치매는 천천히, 아주 조금씩 존재를 지워간다. 기억은 희미해지고, 이름은 낯설어지며, 언어는 파편으로 부서진다. 남아 있는 것은 단지 호흡과 몸짓, 그리고 모호한 표정뿐이다. 딸인 에르노는 그 과정을 외면하지 않고, 날것 그대로 기록한다. 그것은 때로 잔혹하게 보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사랑의 다른 얼굴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끝까지 지켜보는 것이고, 기록한다는 것은 사라짐에 저항하는 가장 인간적인 방식이기 때문이다.

 

책을 읽으며 가장 마음을 붙드는 부분은, 에르노가 어머니를 돌보면서도 결코 순수한 헌신만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녀는 지쳐 있고, 때로는 어머니의 반복되는 말과 행동에 짜증을 낸다. 또, 자기 삶이 어머니에게 매여 있다는 사실에 죄책감을 느끼면서도 동시에 불편해한다. 그러나 바로 그 솔직한 고백 속에서 이 기록은 특별해진다. 에르노는 “효녀”의 가면을 쓰지 않는다. 그녀는 사랑과 피로, 연민과 거부감, 애정과 증오가 섞여 있는 복잡한 감정을 숨기지 않는다. 그렇기에 이 작품은 누구보다 진실하다.

 

“나는 나의 밤을 떠나지 않는다.” 이 제목은 단순히 병실의 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상실과 고독의 시간을 뜻한다. 어머니의 병은 딸에게도 하나의 밤을 가져온다. 그 밤은 길고, 끝이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그 밤을 떠나지 않고 머무는 것, 그것이 에르노가 택한 방식이다. 어머니와 함께 무너져가는 시간을 기록하며, 그녀는 동시에 자신이 살아온 삶의 근원을 돌아본다. 어머니는 단순한 보호 대상이 아니라, 작가 자신을 만든 근원이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기억이 지워질수록, 딸은 오히려 더 치열하게 자기 존재를 확인하려 한다.

 

이 책을 읽으며 문득 나의 삶도 돌아보게 된다. 우리는 누구나 부모의 기억 속에서 태어나고, 그들의 언어와 몸짓 속에서 자라난다. 그러나 언젠가 그 기억의 저장고는 문을 닫고, 우리를 더 이상 불러주지 못한다. 그 순간 우리는 두 번째 고아가 된다. 어린 시절에 부모를 의지하며 살던 존재가, 이제는 부모의 기억에서조차 지워지는 것이다. 그 상실은 단순히 한 사람을 잃는 아픔이 아니라, 나의 기원을 잃는 상실이다.

에르노는 그 상실을 기록하면서, 동시에 글쓰기의 의미를 묻는다. 그녀에게 글쓰기는 단순한 문학적 행위가 아니다. 글쓰기는 곧 기억을 붙잡는 행위이며, 사라짐을 늦추는 저항이다. 어머니의 기억이 무너져 내릴 때, 딸은 글을 통해 그 빈자리를 메우려 한다. 어머니가 더 이상 언어를 이어갈 수 없을 때, 딸은 언어로 어머니의 삶을 대신한다. 그 순간, 글쓰기는 사랑의 연장이 된다.

 

이 책을 덮고 나면, 문득 우리의 일상도 다른 빛깔로 보인다. 누군가의 이름을 불러주고, 함께 밥을 먹고, 함께 대화를 나누는 사소한 순간들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닫게 된다. 그것들은 치매가 가장 먼저 지워버리는 것들이자, 동시에 인간 존재의 가장 근본적인 기초다. 언어와 기억, 이름과 관계. 그것들이 사라질 때, 우리는 여전히 같은 존재라고 말할 수 있을까?

 

에르노의 기록은 우리에게 차갑고 냉정하게 들릴 수도 있다. 그러나 사실 그 속에는 깊은 따뜻함이 숨어 있다. 그녀는 어머니를 동정하거나 신화화하지 않는다. 대신, 끝까지 인간으로서의 어머니를 바라본다. 병든 몸을, 지워지는 언어를, 그리고 그럼에도 여전히 남아 있는 표정을. 그것은 고통스럽지만 동시에 숭고하다. 인간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시선은 언제나 숭고하다.

 

『나는 나의 밤을 떠나지 않는다』는 결국 인간 존재의 유한성에 대한 기록이다. 우리는 모두 언젠가 기억을 잃고, 몸을 잃고, 언어를 잃는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다른 누군가의 기록 속에 남고, 다른 누군가의 마음속에 흔적으로 남는다. 어머니가 딸에게 그랬듯, 딸은 어머니를 글 속에 남긴다. 그리고 언젠가 이 글을 읽는 독자들도 그 흔적을 이어받는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사랑이란 결국 끝까지 머무르는 용기라는 생각을 했다. 떠날 수 없는 밤을 함께 견디는 것, 그 속에서 사라져가는 목소리를 기록하는 것. 그것이 사랑의 또 다른 얼굴이 아닐까. 에르노의 글은 우리에게 말한다. 인간은 언젠가 모두 사라지지만, 그 사라짐을 끝까지 지켜보는 눈과 그것을 기록하는 언어 속에서 우리는 여전히 살아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