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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과 말/책 리뷰

요시모토 바나나 『하치의 마지막 연인』을 읽고

by Stefanokim 2025. 8. 21.

요시모토 바나나의 소설은 언제나 잔잔하다. 파도 소리처럼 큰 격랑을 일으키지 않고, 그저 귓가에서 서성이다가 어느 순간 마음 깊은 곳을 적신다. 『하치의 마지막 연인』 역시 그렇다. 이야기는 한 사람의 일생을 격렬하게 흔들지 않는다. 그러나 읽는 이로 하여금 오래된 기억을 떠올리게 하고, 잊었던 감각들을 소환해낸다. 사랑의 마지막은 어디에서 오는가, 혹은 마지막이라 부를 수 있는 사랑이란 존재하는가, 하는 질문을 던지며.

 

주인공 하치는 평범하면서도 평범하지 않은 인물이다. 요시모토 바나나가 자주 그려내는 여성들처럼, 그는 세상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살아간다. 사람들과 무리하지 않고, 조용히 자신만의 세계를 지켜내려 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삶의 아픔에 아주 민감한 감수성을 지닌다. 가족과 연인, 과거의 기억, 상실과 위로의 순간들이 그를 만들어왔고, 그는 그 속에서 “마지막 연인”이라 부를 수 있는 존재를 마주하게 된다.

 

이 소설에서 중요한 것은 화려한 사건이 아니다. 오히려 사소한 대화, 부엌에 앉아 차를 마시는 순간, 창문 너머의 햇살 같은 일상적 장면들이 이야기의 결을 형성한다. 하치에게 사랑은 거대한 폭풍우가 아니다. 그것은 오래된 잔잔한 강물처럼 흐르는 무엇이며, 그 곁에서 자신이 조금씩 치유되어 가는 과정이다. ‘마지막 연인’은 단지 연애 관계를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 존재를 끝까지 함께 지탱해 줄 수 있는, 말하자면 생의 버팀목 같은 의미를 담는다.

 

요시모토 바나나는 늘 상실과 회복의 이야기를 써왔다. 누군가를 잃은 뒤에도 남은 자는 살아가야 하고, 그 삶은 언젠가 또 다른 만남을 맞이한다. 『하치의 마지막 연인』에서도 이 테마는 반복된다. 하치는 과거의 아픔을 안고 살아가지만, 새로운 사랑 앞에서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자신의 취약함을 인정하고, 그것을 숨기지 않은 채 상대와 나누려 한다. 이 솔직함이야말로 마지막 연인을 진정한 의미로 만들어 주는 조건이다.

 

문학적으로 흥미로운 점은, 이 소설이 사랑을 이상화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치와 연인의 관계는 완벽하지 않다. 그들은 불안과 의심을 겪고, 서로에게 상처를 주기도 한다. 그러나 그 모든 과정을 거치며 둘은 조금씩 단단해진다. 이는 요시모토 바나나가 말하는 ‘치유’의 방식이다. 사랑은 결코 완전하지 않지만, 불완전하기 때문에 서로를 끌어안는 힘이 된다. 그리고 그 불완전함 속에서 마지막 연인이라는 이름은 비로소 빛을 얻는다.

 

나는 이 작품을 읽으며 ‘마지막’이라는 단어의 무게를 오래 곱씹었다. 마지막이란 곧 끝을 의미하지만, 동시에 그 끝은 어떤 절정이기도 하다. 하치가 마지막 연인을 만났다는 것은, 더 이상 다른 사랑을 찾을 필요가 없음을 뜻한다. 그것은 닫힘이 아니라 충만한 채움이다. 어쩌면 우리는 모두 평생을 걸쳐 마지막 연인을 찾고 있는지 모른다. 그리고 그 여정 속에서 만나는 수많은 관계들 역시 그 자체로 소중하다. 하지만 언젠가 마지막이라 부를 수 있는 사랑이 찾아올 때, 우리는 비로소 인생의 긴 퍼즐이 맞춰지는 듯한 안도감을 얻게 될 것이다.

 

요시모토 바나나의 문장은 마치 투명한 유리컵에 담긴 물 같다. 과장되지 않고, 꾸밈없이, 그저 투명하게 빛을 담아낸다. 『하치의 마지막 연인』에서도 그녀는 큰 목소리로 사랑을 말하지 않는다. 대신 아주 조용히, 그러나 깊이 있게 마음의 결을 따라간다. 그래서 독자는 책장을 덮고 나서도 한동안 잔향에 머문다. 누군가와 눈을 마주했던 순간, 손을 잡았던 온기, 아침 햇살 아래 나눈 웃음 같은 기억들이 마음 한구석에서 불쑥 피어오른다.

 

결국 이 작품은 사랑의 궁극적 질문을 던진다. “당신에게 마지막 연인은 누구인가?” 그것은 단순히 연애의 대상이 아니라, 인생에서 마지막까지 함께 서 있을 존재를 묻는 물음이다. 부모일 수도, 친구일 수도, 혹은 자신일 수도 있다. 하치에게 마지막 연인은 한 남자였지만, 독자에게는 각자의 삶을 비추는 거울로 다가온다.

 

『하치의 마지막 연인』은 크게 울리지 않는다. 그러나 그 잔잔한 울림은 오래도록 마음속에 남는다. 마지막이라는 단어가 지닌 따뜻한 완결성과, 그 안에 담긴 고요한 안도. 요시모토 바나나는 이 작품을 통해 우리에게 말한다. 사랑은 결코 거창하지 않다고. 오히려 소박한 일상 속에서, 마주 앉아 웃을 수 있는 순간 속에서, 그리고 서로의 상처를 두려워하지 않는 고백 속에서, 우리는 마지막 연인을 만난다고.